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재일 한국-조선인 (문단 편집) == 역사[* 재일 1세들의 증언을 모아 재일 3세 사진작가가 쓴 책인 '재일 동포 1세, 기억의 저편'을 참조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 현대 재일동포[* 삼국시대 때 넘어간 [[도래인]]이나 임진왜란 때 납치된 도공의 후손 등도 있지만 대부분 흔적도 없이 일본인에 동화되었거나 일부 집안의 [[족보]]상의 이야기로나 남았고, 이들은 재일 한국인의 범주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임성태자]], [[이삼평]], [[도고 시게노리]] 등이 이에 해당한다.]의 시작은 [[대한제국]]때 일본으로 유학한 학생들이 해당된다. [[일제강점기]]부터는 2등 국민 신세가 되지만, 병역의 의무가 없어서[* 조선반도의 조선인까지 징병한 것은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진 1944년9월부터 7개월간으로 징병 병사가 실전에 투입되기도 전에 일본은 패망하였다. 그 전에는 일본인만 징병하고 조선인은 모병제로 조선인 병사를 모집하였다. 이유는 일본어 보급이 낮아서 지휘명령에 어려움이 있기도 하고, 일본군의 명령에 고분고분하게 따라준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보다 사업에 유리하고 외지에서 산다는 끈기가 있어서 조선인을 우대하는 업자도 나와 사업에 성공하는 동포도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일본 본토인부터 자기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시기를 받게 된다. 일본에 돈을 벌기 위해 넘어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특히 [[제주도]] 출신과 [[경상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 비율로 보면 제주도가 50%, 40%가 경상도, 10%는 나머지일 정도. 실제로 이 두 지방은 일본과 거리가 가까워 역사적으로 교류가 있었고 문화적으로 많이 영향을 주고받은 지역이다. 동남아에 있는 화교들이 그 곳과 가까운 광동성, 푸젠성 출신인 것과 같은 이치다. [[오사카]]의 [[이쿠노구]] [[츠루하시역]]에는 올드커머 계통 일본 최대의 [[코리아타운]]이 있는데, 여기의 백제문 현판에는 [[경상도 사투리]]와 [[오사카벤|오사카 사투리]]로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来てえな 見てえな 買うてえな)"라고 써 있을 정도. [[부산]] [[자갈치시장]]에도 똑같은 글귀가 대문에 써 있는데, 영향을 받은 듯 하다. 다른 예를 들면 [[전(한국 요리)|한국 음식 '전']]도 일본에선 서울말 전이 아니라 경상도 방언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인 찌짐(チヂミ)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일본어 메뉴에서도 '전(요리)'의 [[일본어]] 항목은 찌지미(チヂミ)로 작성되어 있다.[[https://style.nikkei.com/article/DGXMZO31817570V10C18A6000000/|#]]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 출신도 일본에 많이 건너갔는데, 본토에서 경상도 인구가 제주도 인구의 20배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일동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비슷하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많이 넘어갔다는 말이다.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는 주산업이 농업과 어업으로, 열악한 산업환경과 인구증가 따른 실직자가 다수 발생하였고, 당시의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 출신에 대해 멸시하는 분위기가 한반도에 있었기에 결국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에서 발생한 실업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비슷하게 차별받는다면 일자리나 대우면에서 한반도보다 훨씬 큰 시장인 일본본토가 메리트가 있었으므로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많은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민들이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났다. 경술국치 이후 일단은 한반도가 일본의 일부로 편입됐기 때문에 그 절차도 다른 외국에 가는 것보다 훨씬 쉬웠고, 특히 1922년 자유도항제가 실시된 후에는 폭발적으로 일본으로 일하러 넘어가는 사람이 늘어났다. 1923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직항 배편이 개통하기도 했다. 한때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민 1/4이 일본에 가 있고 오사카 재일교포의 60%가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 출신이었다. 또한 제주가 경제적으로는 열악해도 주로 정치적 이유로 양반등의 지식계급이 귀양을 오는 유배지였던 덕분에 한국에서 문해 수준과 교육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그 덕분에 일본 생활에서도 적응에 어려움이 없거나 상당한 지위를 구축하는 사람도 나오게 된다. 지금도 [[제주특별자치도|제주]] 토박이치고 일본에 친척 없는 사람이 드물 정도이고, 거의 모든 동네의 마을회관 앞에는 재일교포 공덕비가 세워진 곳이 많다. 1928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배편의 운영사인 일본 회사가 운임을 기존 8원에서 12원 50전으로 인상하자 오사카 거주 [[제주특별자치도|제주]]인들이 반발해 '우리는 우리 배로' 구호를 내걸고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1930년 11월 임대 선박 '교룡환'을 운항하기 시작했다. 교룡환의 요금이 6원 50전이었기에 일본 선사는 부랴부랴 3원으로 운임을 내렸지만,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 사람들은 두 배가 넘는 돈을 내면서도 우리 배를 이용했다. 이는 1930년 11월 7일자 동아일보에 올라와 있다. 때는 [[태평양 전쟁]]. [[일본 정부]]는 조선의 불균형 발전과 공업화의 부진,[* 만주 진출을 의한 중간기지로,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해서 만주에 공급해 왔다.] 인구 증가, 세계 불황, 대량의 실업자 발생, 그로 인한 [[독립운동]]의 기운에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중국]]과 [[만주]]에서 벌이는 전쟁, 그리고 나중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병역의무가 있었던 자기 국민을 마구 징발해 갔기 때문에 일본 본토는 노동력이 부족한 사태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들을 "조선의 실업자에게 일본에 일자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조선인 실업자와, 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일본업자들의 서로 이득되는 정책이라 호평이였지만, 싼 노동력의 대량공급은 노동자의 대우를 급격하게 하락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 노동자를 혹대하여 [[노예]] 취급하게 된다. 전시 상황에서는 우선 대상인 탄광, 군수공장을 제외한 취업지를 제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를 대량의 조선인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은 각 탄광이나 군수공장에서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조치[* 애초에 국민들에게는 승전보만 전달되고 있어서 일본이 진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였기 때문에 일본어/한국어에 대한 소통능력의 부족[* 직원 교육이 수월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숙박 인프라의 구축[* 일본인들은 자택에서 출근하면 됐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은 공장이나 탄광쪽에서 자비로 숙박장소를 구해야했다. 그러나 빠듯한 자금사정에 전시상황이라 제대로 된 숙박장소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그 와중에 나라에서는 자국민을 계속 징발해가고, 징발된 일본인 숙달노동자를 머리수로 대체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수용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받아들이게 된다.]이 따라가주지 못했고, 당시 일본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일본인 우월사상[*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으니 우리 일본인들은 우월하다. = 다른 아시아인들은 미개하다.]이 동반되어 혹독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다가 건너갔던 사람들의 편지 소식으로 인해 취업지의 열악한 환경이 알려지면서 그나마 자발적으로 돈벌러 가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물론, 일손은 엄청나게 필요했고 할당량은 채워야 됐기 때문에 결국 [[징용]]을 실시했다. 당시 강제징용의 형태는 노동력이 필요한 기업의 채용 담당관이 조선에 건너와 인력을 데려가는 형태였다. 그나마 일본에서는 위에서 상술했듯이 고용 사무소가 잘 설치되어서 인력이 금방금방 채워졌지만 조선에서는 고용사무소를 통한 인력수급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연히 채용 담당관들이 전국 각지를 돌면서 채용하게 되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조선 지리, 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지방 공무원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지방 공무원들이 처음에는 구슬리고 위에 나온 택도 없는 법률로 추천하였지만 나중에는 강제로 트럭에 태우는 수법을 이용했다.[* 의외인 것이 당시 징용자들의 가족 대상으로 고용사무소에서 배급품 우선 지급권 등의 혜택을 명시해 놓은 법안이 전쟁 도중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고용 사무소가 일본에는 각 현마다 적어도 2~3개, 많으면 5~6군데 있었지만 조선에는 팔도 전체에 딸랑 2곳이었다. 당연히 가족에 대한 지원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었다.] 참고로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 사람들은 [[3.1 운동]]이나 [[관동대지진]]으로 취직입국이 제한되어 있던 [[일본]]을 거의 자유로이 오고갔다. 얼마나 자유로이 오고갔으면 이런 말이 전해졌다. "긴자의 미츠코시 백화점 스카프가 경성 미츠코시 백화점에 걸리는 것은 1달 뒤,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 소녀의 목에 걸리는 것은 1주일 뒤다." 전쟁 말기에 일본의 패전으로 가면서 일본의 공권력의 약화한 뜸에, 일본 내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우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거나 조합을 설립하여 [[일본]] 업자와 [[일본 정부]]에 대항하게 된다. 후에 이 조합들이 이념으로 해산 및 분열되어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이 된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도 많은 조선인들이 군수공장에서 일했었는데, 이 때 [[원자폭탄]]을 맞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외에도 [[홋카이도]], [[사할린]]등 석탄 다산지에서의 석탄 강제노동으로 끌려간 조선인도 숱하다.[* 이에 대해서는 [[조정래(소설가)|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후반부에 제법 묘사되어 있다. [[홋카이도]]답게 [[아이누]] 촌락도 나온다.] 오늘날, 이들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에서 '''전혀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다만 한국 정부의 경우만 서술하자면 노무현 정부시절에 설치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구체적인 조사에 나선 바 있다. 각종 구술자료집과 자료들을 PDF로 배포한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자경단)과 [[일본군]], [[일본제국 경찰]]에 의하여 무차별적으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학살을 벌여 상당수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요시노 사쿠조의 <<압박과 학살>>에는 2534명, 김승학의 <<한국독립연구서>>에는 6,066명,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로는 200명 대][* [[관동대학살]]은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뿐만 아닌 [[류큐인]], [[부라쿠민]], [[화교]]인, 일본에 거주하던 [[중국인]], 심지어 좌파운동가/[[아나키스트]] 일본인(대표적으로 오오스기 사카에)들도 희생당했다.] 이미 이 당시에 상당히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취급이 어땠는지 이를 보아 짐작할 수 있다. 1923년에 일본 열도에 있던 조선인의 수는 8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20년만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광복 직전인 1945년 패전 직전에는 200만에 이른다. ||[youtube(7T1d67WOwLI)]|| || 전후 한국으로 귀향하는 재일 조선인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 || 해방 후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의 대부분은 [[한반도]]로 돌아갔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몇 살배기 시절에 일본에서 일하던 노동자 부모가 한반도([[포항]])로 돌아간 경우였다.] 불안한 한반도의 정치 상황과 경제 혼란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숫자도 많았고 이들은 일자리가 부족[* 해외에 이주한 일본인이 돌아올 때까지다. 해외의 일본인이 돌아오면 일본인 노동자가 남아 돌고, 법적보호가 없는 재일동포를 고용할 필요도 없기에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업자가 나온다.]했기에, 노동력이 필요했던 한때 일했던 공장과 지역으로 돌아간다. [[오사카]]에 재일동포가 많은 이유는 그 곳에 있는 군수공장이 밀집하고 있었고, 그 곳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일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재일동포 1세대는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6.25 전쟁]]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일본]] 내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이념 대립이 발생해 [[대한민국|남한]]을 지지하거나 [[북한]]을 지지하는 쪽으로 갈라서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재일교포 양대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이하 조총련)가 발족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제주 4.3 사건]]의 참화를 피하기 위한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 출신의 한국인이 대거 일본에 입항하고[* [[제주 4.3 사건]]에서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등의 반공 극우단체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보트피플"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지역(주로 오사카)을 피난처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애당초 일제식민지 당시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 출신 중 1/4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아서, 거기 정착했거나 혹은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여 대규모 학살이 있자, 그것을 한국을 피해 연고가 있는 일본으로 피난한 것이다.], [[6.25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 건너온 이들도 많았다. 반대로 [[재일학도의용군]]이란 이름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재일교포도 있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를 거친 뒤로, 일본에 잔류한 재일교포들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온 각종 사회적 차별에 여전히 시달려야 했다. 또한 남북간의 반목이 민단 vs 조총련이라는 형태로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나타났었고, 이들은 서로 헐뜯기 바빴다. 그 와중에도 이 두 단체가 화해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 좌절로 돌아갔다.[* 한민통 등의 단체가 줄기차게 동포사회의 통합을 추진했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지원하는 등 여러가지로 노력했으나 한쪽에서는 용공이라고 까이고 한쪽에서는 [[반동]]이라고 까였다. 단, 한민통 자체는 '''한국의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단체'''이다.] 1960년대~1980년대의 독재시절에는 간첩사건을 찾아다니던 중앙정보부나 보안사에서는 재일교포를 한국인이 아니니 잡아서 고문과 허위 자백을 받아도 별 탈이 없어 간첩 조작을 쉽게 할 수 있는 호구로 봤고 이 때문에 많은 재일교포들이 고초를 겪었는데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을 포함해서 재일교포 간첩 사건만 100건이 넘어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2&oid=056&aid=0010870170|#]] 사회에서도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니 외국인 특히 일본인 취급받기가 일쑤였다.[* 그중 일부는 1980년에 한국어를 제대로 못해서 그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기도 했다.] '''[[숙청|북한에선 더 심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재일 출신 귀환자들을 '재포' 내지는 '째포'라고 낮춰 부른다. 그 와중에, 일본 정부는 패전초기에 비해서 급격하게 늘어난 재일교포와 그에 따른 물자부족, 치안악화, 잦은 민족단체들의 충돌에 따른 테러위험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과 협의하여 자국에 있는 다수의 북한 출신이나 좌익인 재일 조선인을 일본 적십자회의 이름으로 배에 태워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사업을 실시한다. 본래 북한은 UN에서 인정하지 않은 비합법적인 국가였으나, 일본 적십자회는 이를 묵인하고 북송을 추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여 한반도의 합법적인 정부는 오직 [[대한민국]]뿐이며, 따라서 일본에 거주하던 교포의 송환지도 대한민국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부의 분쟁들을 하루 빨리 정리하고 싶어했던 미국이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국적 선택은 다른 국가가 참견할 수 없는 권리라고 내세우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북한과 일본 매스컴 모두가 북한을 살기 좋은 유토피아로 묘사하면서 북송을 희망하는 교포들을 [[재일교포 북송]]으로 끌어모았다. [* 당시 궁핍하던 재일 조선인에게는 자신들을 버리다시피 하고 아무런 지원도 하지않는 대한민국 보다는, 조총련을 통한 재일 조선인들의 생활지원, 노조/법정 지원, 민족 교육 지원, 김장 담그기 등의 문화 유지 지원, 북한의 프로파간다 영화이지만, 당시로서는 유일한 낙인 북한 선전 영화의 상영인 오락 지원등의 각종 지원을 해주기에 한국쪽 사람들도 민족 교육받으로 [[조선학교]]에 가던 시대라, 당연히 북한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으며, 일본 좌익세력들도 동반해서 북한은 낙원이라는 보증을 해주는 상황이였다. 실제로 70, 8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막장테크에 비하면 북한은 상당히 정상적인 국가였고 그때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허나 실상은 일본에 살던 시절보다 더욱 궁핍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토사구팽|이렇게 북송한 사람들을 자본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라 치부하며 온갖 차별을 가했다.]]''' 이윽고 북한 내부의 비인권적인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나갔는데 정작 '''국제 적십자회는 이를 쉬쉬했다.'''[* 한 마디로 국제협회가 한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수많은 민간인들을 속여 악랄한 북한에 보냈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당시 한국은 국제적 발언력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그 땐 북한보다 국력이 약하고 힘이 없는 국가였다.] 게다가 소문은 처음 북송한 지 몇 년이 지나 처음 흘러나왔으나[* [[홍콩행 게이바|북한에 간 사람들이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 적이 없었다.]] 편지로 가족들간의 안위를 물을 수 있었는데 심한 검열 속에서도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편지들이 일본에 전해졌다. 북송된 사람들 중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탈북하여 일본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것도 1990년대에 말이다.], 일본 적십자회는 무려 1980년대까지 재일교포의 북송을 추진했다. 멋모르고 북한행 배에 탑승했던 9만명의 재일 조선인과 1,800여명의 일본인들의 운명은 [* 당시 북한행 배에 몸을 실은 교포들 대부분은 '''[[낚시|북한을 엄청나게 선진화된 사회, 복지국가]]'''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1970년대 중반까지는 소련 지원에 의해 남한보다 북한 경제사정이 더 나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봐야 그 시절 훨씬 선진국이었던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그나마 북한의 나았던 경제사정도 이후 상황은 역전되었으며 거기에 남한사회가 민주화되는데, 북한은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강철환]]의 수필 <[[수용소의 노래]]>에서 작가의 조부모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이민을 가 그 곳에서 자수성가한 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저 시기 북한행 배를 타고 [[평양]]에서 정착하다 어느 날 작가의 어머니의 밀고로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요덕 제15호 관리소|요덕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 이 때 당시 많은 조총련계 재일 조선인이 이러한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비참하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재일 조선인, 특히 조총련계의 반수 이상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결국, 북한에만 득이 되었고, 일본 내 조총련계 재일 한국인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재일교포 북송]]을 참고할 것. 다만 이때 북한과 일본이 저지른 일은 나중에 일본인 ~~종북주의자~~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요도호 공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이들의 약점과 꼬투리를 잡을 구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일본 내부에서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은 '''[[빨갱이]] [[공작원]]''',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은 '''[[파시스트]] [[깡패]]'''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이 항목 초반에도 잠시 나와있듯, 민단의 구성원 중 상당부분이 무직인데다가, 이 항목 끝에 서술되어 있는 재일한국인 중 민단계의 거물 상당수가 실제로 [[야쿠자]]라는 점, 그리고 '''심지어 그 야쿠자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민단 건설 및 교포사회 확립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훈장]]까지 받았다는 점'''[* [[박정희]]와 [[전두환]] 정부는 일본 내에서 조총련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민단을 지원했다. 하지만 조총련처럼 학교를 세운다거나 하는 식의 지원이 아니고 그냥 '''민단이라는 단체에만''' 지원했다. 재일동포를 위한 지원이 아니라 북한세력 견제라는 정치적 목적만을 가진 이 지원은 남북한을 각각 지지하는 재일동포사회에 반목만 심어주게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그 지원이라는게 평범한 재일동포에게까지 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특히 올드커머 사이에서 한국 정부의 신뢰도는 바닥을 쳤었다. 사실 북한이 조총련계긴 하지만 재일동포에 들인 공에 비하면 한국 정부는 재일동포에게 무심해도 너무 무심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요원을 비밀리에 보내어 민단직원으로 등용시켜서 대한민국산하기관으로 만들려고 하고, 민단은 독립성을 지키기위해서 안기부요원을 색출해내는 첩보전이 적지않게 있었다. 당시 북한에 대한 정보는 북한으로 간 재일교포들과 연결된 북한계 재일교포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이였으며, 조총련은 북한 첩보전에도 협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단과 조총련은 서로 요원을 보내, 도청과 미행하여 기밀정보를 빼돌리는 등의 첩보전을 해왔고,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기위해서 민단에 대한 한일첩보기관의 요원이 접촉하려는 움직임이 잦았다. 현재는 조총련 자체의 영향력의 저하와 더불어, 일본정부의 감시태세강화, 북한에서의 [[조총련]]의 중요성 하락에 따라 [[민단]]에서 얻을수 있는 정보의 중요성도 떨어지면서 이러한 첩보전은 서로 상대를 도청하는 정도로 되었다.]에서 이런 오명을 얻은 흑역사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리고 조총련계는 일본 내 민간인 납치사건과 관련하여 [[흑역사]]가 존재하고, 실제로 조총련은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비롯한 급진 과격단체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시선이 고울래야 고울 수가 없다. 조총련계와 그 가족의 현재 처지를 단적으로 나타낸 비극적인 사례로,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재일조선인 하야시 야스오(林 泰男, 임태남)이 있다. 야스오의 아버지는 북한 출신의 조총련계 비밀공작원이었고, 이미 [[일본 경찰]]에게 항상 마크당하는 상태였다. 중학교 때까지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걸 몰랐던 야스오는 평소 재일한국인들을 멸시해왔으나, 아버지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재일 조선인이라는 걸 알게 되자 지금까지 재일한국인을 멸시해 온 스스로의 위선적인 모습에 충격과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코카쿠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다니던 중[* 학부생 자격으로 인공지능 연구에 참여했다. 이 사람이 학생이던 당시 일본 통상산업성에서는 '제5세대 컴퓨터' 개발에 국가적 예산을 투입해가면서 인공지능 연구를 지원하고 있었으며, 야스오도 이를 의식해서 전공을 선택했던 듯하다. 참고로 당시에는 규칙기반(rule-based) 자연어 알고리즘이 대세였으며, 여기에 지식기반(knowledge-based) 시스템이 여럿 개발되고, 논문은 발표되었는데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던 오차 역전파(back propagation) 알고리즘이 뒤늦게 빛을 보기 시작했으며, RNN(recurrent neural network)이 1982년 발표되는 등 여러 성과로 인해 제1차 AI 겨울에 막 해빙기가 오고 있던 때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고, 대학 졸업 후 전 세계를 방황하며 떠돌다 옴진리교 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교단 내에서도 운전사 등 한직에 위치했던 그는 [[아사하라 쇼코]]에게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었다. 결국 도쿄 사건에 가담하게 된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려고 남들은 사린가스 용액이 든 봉지 하나만 들고 가는데 3개나 들고 나가서 더 많은 구멍을 뚫었으며, 지하철이 출발하는 타이밍을 잘 잡은 덕분에 그가 탔던 열차 안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였다. 이 후 1년여의 도주 생활 동안 가장 위험한 도주범으로 손꼽혔으며, 결국 1996년에 잡혀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후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2018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GHQ]](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전후에 조선인의 귀국을 허락하면서 귀국시 가져갈 수 있는 재산 규모에 제한을 두었고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연합군 최고사령부 측에서 징용된 조선인들의 귀국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 상당수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일본의 공장이나 농지 등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에 남아 있다가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 등의 여파로 계속 일본에 사는 것을 선택했다.[* 지금 일본인들 중에 할아버지가 조선 사람이었다는 경우는,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인 아내를 들여 한일 혼혈로 태어난 케이스다.] 1952년부터 일본 정부는 '외국인 등록법' 14조를 제정해 재일동포에게도 지문을 강제 날인토록 했는데, 3년 갱신이 원칙이며 위반 시 1년 이하 징역 및 금고, 벌금 3만 엔을 내도록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외국인에 대한 감시 및 통제수단이라는 지적이 일어 1980년 9월 신주쿠구청에서 교포 1세 한종석이 지문 찍기를 거부했고, 이에 2세들도 동참해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일으켜 정부에 철폐를 촉구하며 재판도 벌였다. 결국 일본 정부는 지문날인 주기를 1982년 5년, 1987년 1회로 각각 완화시키다가 1993년에 완전 폐지했다. 현재 한국에 재정착한 재일교포들은 현재 제주도, 경상도에 주로 살고 있다. 이 후손들은 현재 한국에 동화되었다고 해도 된다. 그리고 한국어하고 일본어 둘 다 유창하게 한다.[* 그 이전 세대는 한국어의 어려움 때문에 피진인 [[재일어]]를 구사했다.] 그래도 몇몇은 아직도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생만 하기도 한다. 다만 1990년대생 이후의 세대는 그 이전 세대에 비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하다.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 모국 돕기에 앞장서 온 재일한국인의 역사를 초중고 교과서에 실어서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1&oid=001&aid=001208478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